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살라흐 앗 딘 유수프 (문단 편집) == 현대의 평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4508513-1-1-1.jpg|width=100%]]}}} || || '''{{{#000 [[다마스쿠스|{{{#000 다마스쿠스}}}]]의 살라딘 동상 (1997년작) }}}''' || [[대인]](大人)이라고 알려져 있던 덕에 과거 유럽에서도 평이 좋은 편이었다. 살라흐 앗 딘은 [[이라크]] 북부의 소수민족 [[쿠르드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르빌에는 살라흐 앗 딘 대학도 있다. 일례로 이라크와 시리아의 전 [[독재자]]였던 [[사담 후세인]]과 [[하페즈 알 아사드]][* 현 [[시리아]] 대통령인 [[바샤르 알 아사드]]의 아버지다.]는 자기 자신에게 살라흐 앗 딘의 이미지를 덧씌우기를 즐겨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이 둘은 살라흐 앗 딘의 출신 민족인 [[쿠르드족]]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탄압]] / [[학살]]하거나 홀대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물론 이들의 처우는 사담과 하페즈가 사망하고 정권을 잃고 몰락한 이후에 와서야 그나마 개선되었다.] [[시리아]] 다마스쿠스에는 살라흐 앗 딘의 동상이 서 있는 살라흐 앗 딘 광장도 있다. 살라흐 앗 딘은 이슬람에서 '''[[무함마드]]''', '''[[알리]]'''와 함께 항상 거론되는 최고의 [[영웅]]이며, 이런 그의 상징성 덕분에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뒤 [[시리아]]를 점령한 [[프랑스]]군의 [[앙리 구로]][* 종심방어전술을 창안한 그 구로가 맞다.] 장군은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자마자 먼저 그의 무덤에 찾아가 기독교의 승리를 선언한 일이 있다. >'''Réveille-toi, Saladin. nous sommes de retour. Ma présence ici consacre la victoire de la croix sur le croissant.''' >'''보라, 살라흐 앗 딘이여. 우리가 다시 돌아왔다. 지금 여기 나의 존재가 초승달(이슬람)에 대한 십자가(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살라흐 앗 딘은 중세 이래로 유럽에서 기사도 정신을 지닌 영웅으로 찬사받아 왔지만, 정작 이슬람권에서는 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 이슬람 교도들은 본래 관대한 성격의 살라흐 앗 딘 보다도 무자비하면서도 막강했던 [[바이바르스]]를 십자군 전쟁의 영웅으로 꼽곤 했다. 살라흐 앗 딘이 다시 이슬람 역사 속의 영웅으로 재조명을 받게 된 현상은 비교적 근현대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이집트 출신의 역사학자이자 이슬람학자인 압둘 라흐만 하산 아잠(Abdul Rahman Azzam) ^^(1893년 ~ 1976년)^^은 한편 그의 2009년《살라흐 앗 딘 평전》에서 "기존 문화 비평계와 역사학계는 왜 이슬람, 아랍권 내에서 살라흐 앗 딘이 신화적인 입지까지 올라갔는지 '''상당히 기본적인 사실을 간과하고''' 멀리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고 주장했다. 상술한대로 사실 적에게 배푼 관용은 적대적 입장에서 싸웠던 기독교 세계와 서구의 후예들에게 더 와 닿는 이야기지 무슬림들 본인들에게 그렇게까지 와 닿지 않는 반면, 군사적으로도 [[리처드 1세]] 뿐만 아니라 전임자인 [[누르 앗 딘]]이나 후임인 [[바이바르스]]에 비해 딱히 압도적이라 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왜 다른 십자군 전쟁기의 이슬람권 지도자들을 재치고 살라흐 앗 딘이 후대, 특히 19 ~ 20세기에 와서 그렇게 추앙 받았는가 하니 바로 '''[[아바스 왕조]]의 분열 이후 정치적으로 산산조각나 [[시아파]], [[튀르크]]인, [[십자군]]들에게 농락 당하던 이집트-시리아 일대를 재통합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현대 이집트-팔레스타인-시리아 일대는 다마스쿠스가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였을 시절부터 통일 이슬람 제국의 핵심 국력의 원천이 된 땅들이었다. 이슬람의 발상지는 아라비아 반도지만 이곳은 기원전에 이미 [[사막화]]된 척박한 땅이라서 통일 이슬람 제국의 기반이 되기에는 생산력이 너무나 부족했고, 따라서 이슬람 극초기 정통 칼리파 시대 이후에는 더이상 이슬람 세계의 중심으로 기능할 수 없었다. 반면 [[이집트]]-[[시리아]]-[[메소포타미아]] 일대는 인류 역사의 태동기부터 발달된 문명을 구가해 온 풍요롭고 번영하는 지역이었기에 이 지역이 [[우마이야 왕조]] ~ [[아바스 왕조]]에 이르는 기간 동안 통일 이슬람 제국의 세력 기반이 되었던 것. 이 때문에 정통 칼리파 시대의 교단적 성격을 탈피하여 [[세속 국가]]의 기틀을 다진 우마이야 왕조가 시리아의 중심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아 번영한 것이다.[* 물론 우마이야 왕조 이후 나타난 [[아바스 왕조]] 시대에는 수도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바그다드]]로 옮겨가기는 했는데, 이는 아바스 왕조 자체의 성립 당시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차별받던) 페르시아인들을 중요한 지지기반 중 하나로 삼고 있었기에 페르시아 지역으로부터 가까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긴 것에 가깝다. 현대의 경우 [[이라크-이란 관계|메소포타미아-특히 이라크의 정체성이 페르시아적 정체성을 이은 이란의 정체성과 많이 분리되었지만]],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핵심 영토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정체성은 페르시아적 정체성에 비교적 가까웠다. 게다가 [[이란-이라크 전쟁|이라크와 이란이 전쟁까지 벌인]] 현대에 와서도 이라크 인구 중 수니파의 비율은 고작 20%에 지나지 않으며, 시아파의 비율이 무려 60%에 달한다. 즉, 현대 기준으로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정체성은 [[아랍]] 문화권의 주류인 [[수니파]] 이슬람과 꽤 명확히 구별되고 있는 것. 그래서 [[사담 후세인]] 사후 들어선 현재의 이라크 정부 (정 • 부통령을 제외한) 핵심 인사는 [[시아파]]다.] 즉, 아랍-이슬람 문화권을 기준으로 보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페르시아에 가까운 변방이라 볼 수 있고, 시리아 + 이집트가 바로 아랍-이슬람 제국을 지탱하는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어, 범아랍주의를 주장하는 아랍 연맹, 또는 아랍 통일국가 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기대받고 있는 국가가 바로 시리아와 이집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가 [[시리아]]-[[이집트]]-[[팔레스타인]]-[[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정치적 통합을 다시금 이뤄낸 것이 큰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것. 아바스 제국의 분열과 십자군의 침공 이전 이슬람 제국의 약화 또한 이슬람 수니파에 있어 이단이라 할 수 있는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먹고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아바스 왕조를 노리면서 저 지방들의 연결이 끊어졌던 점이 컸다. 살라흐 앗 딘, 그리고 그 전임자인 장기 왕조가 부상한 시대는 십자군의 침공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해안지역 일대가 전부 이교도에 넘어가면서 이 아랍 이슬람 제국들의 심장부의 분단이 영구화될 가능성이 커 보였던 시절이었다. 이런 와중 돌풍처럼 나타난 살라흐 앗 딘은 시아파를 척결하여 이집트를 수니파 정통으로 되돌려 놓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워 [[장기 왕조]]의 위업을 계승하여 십자군 왕국들의 척추를 부러뜨리고, 저 지역들의 정치적 통합을 복구하면서 훗날 몽골의 침략이란 거대한 돌풍에도 불구하고 [[맘루크 왕조]], 그리고 [[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지는 보편 이슬람 제국의 명맥이 이어질 기반을 마련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이슬람, 아랍권 세계 내의 지정학적 보편성이 산산조각나고, 20세기 [[아랍 민족주의]]가 뜨고 지는 것에 열광하다 실망하며, 결국 아랍 세계가 지속 된 내부 불화와 분단으로 인해 갈수록 오히려 더 서구에게 더 무시받고, 종속적으로 떨어져가는 현실을 겪은 현대 아랍 민중과 지식인들에게 있어 이런 살라흐 앗 딘이 남긴 지정학적 통합이란 역사적 유산은 그 다른 어떤 요소보다 더 강렬한 신화적 매력이라는게 아잠 박사의 주장이다. 군사적으로는 저평가되는 면이 있는데, 사실 살라딘의 진면모는 전술적 능력보다는 부하들을 끌어모으고 유리한 결과를 끌어모으는 외교력과 정치력, 전략적 능력에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